내가 대한민국에 도착한것은 12월 초, 추운 겨울이었다.
하지만 겨울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오르내리는 함경북도 북방에서 자란 나에게는 이 곳의 겨울은 눈부시게 내리 쬐는 햇살로 포근하고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이날은 내게 있어서 두번째 인생이 시작된 가장 뜻깊고 행복했던 날로 추억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새겨놓았다.
한국에 온지 7일만에 남산타워와 남대문시장 관광을 간다고 하기에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도착할 때는 밤이어서 현란한 네온등으로 번쩍이는 고층건물도 보이고 굉장히 화려하고 멋지던데 낮에 보는 느낌은 어떨까'하는 궁금증에 빨리 가보고 싶어 내 마음은 마냥 들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강교에 들어서는 순간 북한에서 교육받았던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차창 밖으로 한강교 아래를 목이 빠져라 내다보았다.
우리를 인솔하던 한 분이 그런 나를 지켜보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내다보냐고 묻는 말에 서슴없이 "한강교 밑에 거지촌이 있다기에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자 그분은 "그래요, 그럼 실컷 보세요. 보니 어떤가요?" 하며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거지촌은 고사하고 그 넓은 한강에 물이 가득히 차있는것을 보았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속아 살아온 지아온 인생에 대한 허탈함을 금할 수 없었다.
겨울인데도 서울에는 파릇파릇하게 잔디가 살아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마다 얼굴에는 화기가 돌고 열정이 어려있었으며 우리에게 건네는 그들의 말마디마다 정이 넘쳐흘렀다.
분명 우리는, 아니 남과 북은 한 나라, 한 땅덩어리에 살고 있음이 틀림없는데 피부도, 얼굴빛도 다르고 한쪽은 굶주려 울고 한쪽은 행복에 겨워 있고... 어쩜 이렇게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으며 얼마후 비로소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남과 북에 사는 우리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은 바로 한족에는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이고 다른 한쪽은 자유가 없는 독재국가로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때부터 자유를 만끽한 사람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한다.
국민들이 정부에 대하고 할 말을 하고 노동자, 청년 온 국민들이 그 어떤 목적을 위해 거리에서 소리치며 시위를 할 수 있는 것도, 찢어진 청바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기의 개성을 살릴수 잇는것 등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자유와 민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온지 어느덧 6년 남짓 되었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한데 그 구름처럼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만 있다면 버드나무에라도 든든히 묶어두었으면 좋으련만... 인간이기에 어쩔수가 없다.
정부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가전제품도 사고 시장도 보아야 하겠기에 처음 몇 번은 담당경찰관과 함께 다녔지만 언제까지 그들의 도움만 받을 수 없어 친정어머님과 함께 시장을 나갔다.
어머님이 워낙 쌈을 좋아하셔서 야채가게 앞에 이루어 "아주머니, 저기 부루 한 키로 주세요"했더니 생소한 북한 말투로 알지 못할 물건을 찾는 나를 아래위로 자세히 훝어보던 젊은 아주머니가 "뭘 달라요?"하며 되묻는 것이었다.
그제야 말이 틀리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서있다가 어머니와 나를 의아해 쳐다보는 그 아주머니에게 다시 "이것 조금만 주세요"하고 기어 들어가는 말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아 이제보니 텔레비전에 나오던 그 사람들이네요.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열심히 사세요. 여기 오니 어때요? 그리고 이것은 상추라고 해요. 말이 많이 틀리죠?"하며 미처 숨도 돌릴사이 없이 연속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가르쳐 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 덕에 물건을 싸게 구입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물건을 구입할 때 매우 조심스러웠고 화장품가게나 옷가게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말을 하지 않고 둘러보고 있다가 주인 혼자 있을때 물어보거나, 물건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구입하는 것을 보고 외워 두었다가는 구입하곤 하였다. 그야말로 눈치놀음이었다.
나는 이곳에 와서 여자로서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음식은 많이 달고 북한에서 별로 맛보지 못한 이상한 양념 맛이 났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음식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누가 나가서 음식을 사준다며 뭘 먹겠냐고 물으면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딱 한가지, 냉면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다른 것도 먹어봐야 한국음식에 빨리 익숙해진다고 피자, 햄버거, 자장면, 탕수육 같은 것들을 주문해 주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피자 끝머리 빵 조각만 떼어먹거나 탕수육 한 두개정도 먹고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 후 언제까지나 음식을 가려 먹을 수만은 없어서 직접 뛰어들어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조리학원을 등록하였다. 거기서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계량컵이 무엇인지 계량스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으며 영어가 많이 섞인 말들이 많아 도무지 알아듣기 어렵고 그런 내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부끄럽다고 모르는 대로 지나칠 수 없어 모르는 말이 있을 때마다 옆 사람에게 다가가 물어보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의아해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울정도였지만...
학원에서 자기소개하는 시간이 있어 "나는 북한에서 온 이연경입니다. 모르는 것이 많아 어려운 점도 많지만 여러분들이 도와준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 소개하자 내 억양을 듣고 중국교포겠지 생각했던 학원동료들은 깜짝 놀라면서 "북한에서 온 사람들, 말은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같이 생활하기는 처음이에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봐요. 기꺼이 도와 줄게요"하며 너무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힘을 얻어 열심히 배웠고 다가서기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 곳 사람들과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며 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나는 늘 그들에게 감사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독불장군이 되기보다 항상 배우고자 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상대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성심성의로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취직했던 직장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차별도 받아 보았고, 웃으며 도와준다던 사람에게서 사기도 당했다.
그들은 이제 적응하려고 허둥대는 나에게 쓰리도록 아픈 마음의 상처도 안겨주어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게 했으며, 사람들을 대하고 세상 일에 뛰어들려고 할 때마다 겁이 나서 움츠려 들게 하였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용기와 힘을 내서 일어나 달려야 했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 있고, 또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그래야 했다.
나는 처음 이곳에 적응 할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아기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다. 아기가 엄마품에서 태어나 앉는 법, 기는 법, 서는 법, 일어서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엄마에게서 배워나가듯이 나 역시 한국의 성실한 사람들, 앞서 온 탈북자들로부터 올바르게, 그리고 성실하게 배워야 한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거야"라고...
지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부끄러워말고 배워라. 세상은 생각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다. 움츠러들면 들수록 세상은 너에게 더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행복을 꿈꾸어라. 그러면 타락의 구덩이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길 것이고, 그 힘과 용기로 열심히 살게 되면 꿈꾸었던 행복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다"라고...
필자-이연경, 출처 탈북자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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