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
가게 일이 바빠서 매일 아침 정신
없이 나가다 보면 언제나 운동화를 신게 된다. 매일 운동화만 신고 다
니다 보니, 다른 신발을 신을 기회가 없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은 일요일. 운동화 대신 신고 나갈 만한 게 없
을까 해서 신발장을 뒤져보았다. 신발장이 번잡스러워서 이 기회에 아
예 정리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작아서 못 신는 아들 운동화, 굽이 부러지거나 가죽이 벗겨진 딸애
의 구두, 언젠가는 신겠지 하고 들여놓았던 내 구두들······.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신을 수도 없는 낡고 해진 신발들은 과
감히 버리기로 했다. 쓸데없이 어수선하기만 했던 신발장 안이 깔끔
해졌다.
그렇게 내놓은 신발들을 버릴 것과 재활용할 것으로 구분하는데, 이
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신문으로 돌돌 말아 싼 뭉치였다.
'이게 대체 뭘까? 도통 기억이 안 나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것을 풀어보았다. 깜짝 놀랐다. 털신이었다.
그나마 있던 털이 듬성듬성 빠지고 밑창이 새서 도저히 신을 수 없는
털신.. 그 털신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8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이들과 교회에 가려고 서둘러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친구네 갔다 온다"던 아들애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교회는 가야겠는데······.오지 않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
닐까 걱정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추운 날씨에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들어온 아이를 보
자 울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느라고 이제 오는 거야? 엄마랑 누나랑 너
기다린 거 알아, 몰라! 교회 갈 시간도 늦어버렸잖아!"
아이는 얼마나 서둘러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느라 대답조차 제대
로 못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손에 든 검은 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아이의 손은 꽁꽁 얼어 있었다.
"엄마 신어. 이거 신으면 발 안 시리대.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아이는 입조차 얼었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이게 뭔데?"
봉지를 여는 순간 내 입이 딱 벌어졌다. 털신이었다. 할머니들이 한
겨울 내내 신고 버티는 털신.
그 즈음에도 그런 털신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당시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디서 그것을 살 수 있었는지, 그게 더 놀랍
고 궁금했다. 더구나 그 추운 밤에 말이다.
아이가 말했다.
"학교 가는 길목 시장에 있던데. 엄마는 가게에서 일하니까 요즘처
럼 추울 때 발 시릴 거 아냐. 그래서 내가 용돈 모아서 크리스마스 선
물로 샀어."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쁜지 나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며칠 후, 그 신발 가게 아저씨를 찾아가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한 달 넘게 아침저녁으로 와서는 털신에 대해 묻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아저씨, 저 털신 신으면 정말 발 안 시려요? 여기 있는 거 다 팔리면
또 갖다 놓으실 거예요?"
아저씨는 매일 인사하듯 들르는 아이에게 꽤나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친다고 혼을 냈는데, 아이가 워낙 진지하게 털신에 대해
묻고 쳐다보고 만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에 찾아와서는 "돈이 모자라니 조금
깎아달라"고 했단다. 털신 값이 7,000원이었는데 6,850원, 그것도 전
부 동전으로 내어놓는 아이를 보고 아저씨는 '고놈 참 기특하다' 싶
어서 아이에게 500원을 되돌려주었다는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 아들, 아버지 없이도 반듯하게 잘 자라주는구나.'
그러나 뿌듯한 마음 한편으로 용돈이라고 제대로 줘보지 못했는데
어린것이 그 돈을 모으려고 얼마나 애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팠다. 아이가 모을 수 있는 돈이란 게 어쩌다 내가 주는 심부름 값,
가게 손님이나 친척 들이 가끔 주는 용돈이 전부였을 텐데 말이다.
내 발은 그 털신 덕분에 그해 겨울, 조금도 시리지 않았다.그 뒤로
도 겨울만 되면 꺼내 신다 보니 어느새 듬성듬성 털이 빠지고 밑창이
새서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물이 스며들어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
었다.
아들은 "더 좋은 신발 사드릴 테니 버리세요"라고 야단이었지만, 나
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 다루듯 잘 싸서 신발장 안에 넣어두었
다. 비록 형편없이 낡아버렸지만, 얼굴까지 꽁꽁 얼어가면서 신발 가
게로 달려갔을 아이의 사랑이 스민 그 털신을 이 세상 어떤 신발과 감
히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신을 수는 없지만 두고두고 꺼내
보기라도 할 생각이다.
세월이 흐르고, 그때의 열 살짜리 꼬마는 엄마인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성큼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그때만큼 다정하지도
않고 때론 무뚝뚝하기까지 해서 가끔씩 섭섭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털신을 꺼내 보면서 아이의 그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고 싶다.
시린 엄마 발이 걱정되어 사탕 하나, 과자 한 봉지의 유혹을 뿌리친
채 몇 달 동안 고사리 손으로 모은 돈으로 사준 털신 한 켤레. 그것은
그동안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중 가장 소중하고 비싼 것이었다.
그해 겨울 내내 나의 발은 참으로 따뜻했다. 아직도 그해 겨울의 크
리스마스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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