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대해선 꽤 많은 이야기가 있다. 서울대 수석합격자가 <삼국지>를 여러 번 읽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서 이문열의 <삼국지>조차 오류투성이라는 주장까지. 이미 오래 전에 청나라의 장학성(章學誠)이라는 사학자는 소설 <삼국지>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은 30%, 나머지 70%는 허구’(三實七虛)라는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명나라 때 나관중이 지었다는 소설 <삼국연의>(삼국지연의)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고 제갈량을 끌어들여 조조와 열심히 싸웠고 결국 삼국(위,촉,오)을 정립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절은 서기 200년대 무렵이다. 한나라가 망해갈 무렵부터 삼국이 정립하는 시기까지 통틀어 70년 정도의 이야기이다. 그 때 중원에서 말 달리며 싸웠던 영웅호걸들이 다 죽은 뒤 다시 100년 쯤 지나 진수(陳壽)라는 사람이 그 동안 남아있는 역사자료와 전해들은 증언들을 모아모아 <삼국지>(三國志)라는 역사책을 내놓는다. 이른바 국가가 공식 승인한 정사(正史)이다. 물론 당시는 위나라가 대세였으니 역사의 관점은 ‘유비의 촉’이 아니라 ‘조조의 위’에 맞춰진다. 그런데 세월이 1000년 쯤 더 지난 뒤 명(明)대에 이르러 나관중이란 사람은 역사책 <삼국지>(三國志)와 각종 설화, 민간전설, 야사 등을 참조하여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내놓은 것이다. 이때는 이미 조조는 천하의 간악한 놈이라는 덧칠된 상태이고 유비가 모범이 되는 인물로 대중의 정서는 바뀐 상태이다. 물론 관우는 유교적 충정의 화신으로 뚜렷이 자리 잡았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런 유비 중심의<삼국지>를 읽고, 배우고, 교훈을 얻어야한다고 교육받았고 말이다. 물론, ‘조조는 억울하다’, ‘조조에겐 배울 게 많다’며 조조 바로세우기 운동이 중국학술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일방적 조조 띄우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소설<삼국지>와는 별개로 역사 인물 조조에 대한 재조명과 재해석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최근 것으로는 아마 중국 CCTV의 대중교양강좌를 통해 화제가 된 이중텐(易中天)교수의 <삼국지 강의>(品三國)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 이나미 리츠코의 책들도 한국에 소개되었다. 한국의 많은 삼국지 전문가들도 삼국지 파헤치기 책을 내놓았다. 그런 책들을 읽어보면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소설은 역사를 재밌고 다채롭게 재해석한다는 사실!
이번에 홍콩의 두 감독이 삼국지에 도전했다. <무간도>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장문강, 맥조휘가 공동감독으로 나서 삼국지를 재해석한다. 이번엔 유비가 주인공이 아니라 ‘관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는 조조를 내세워 참신한 역사해석을 시도한다. 사실 소설 <삼국지>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적 실존인물도 있고 순전히 지어낸 가상의 인물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세우든지 독립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 오우삼은 이미 두편짜리 <적벽대전>을 만들었다. 유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스토리도 가능하고, 제갈량을 내세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 수도 있다. 장비를 앞세우면 아마도 코믹 액션영화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조자룡^^(조자양은 ▶여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삼국지 용의 부활>)도 만들어졌다. 관우를 주인공으로 하면 어떨까. 관우도 나름대로 드라마틱한 존재이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도원결의 이후 관우가 어떻게 강인한 인상을 주며 등장하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 의형제를 맺는다. 동탁에 대항하기 위해 각지의 군웅이 모여들 때 이들도 세상에 나선다. 그런데 천하의 용사들이 동탁의 맹장 화웅 앞에 쩔쩔 맬 때 긴 수염의 아저씨가 등장한다. 관우이다. “이 술잔이 식기 전에 저 놈을 무찌르고 오겠소..” 하고는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나가더니 청룡언월도를 휙 휘둘러 화웅의 목을 베고는 “음. 아직 술이 식지 않았군...”한 그 관우이다. 역사상 가장 멋진 액션 히어로의 등장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대목에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었다. 관우가 “내가 나가겠소.”하고 나섰을 때 원술이 화를 낸다. “뭐라고? 마궁수 주제에 어디 감히 장군들이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하고 화를 낸다. 이 때 옆에 있던 사람이 “뭐,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고 저 사람 용모가 범상치 않으니 한번 봅시다.”라며 거들던 인물이 바로 조조이다. 조조와 관우는 그렇게 소설 <삼국지>의 초반에 대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관우는 유비 쫓아다니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게 되고, 조조는 한 헌제를 조롱하며 간악하고 중원을 차지해 간다. 바로 이즈음부터 영화 <삼국지 명장 관우>는 펼쳐진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화웅의 목을 벤 것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다. 소설 삼국지는 그런 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바꿔놓는다. 그냥 ‘三實七虛’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니다)
관우, 조조와 만나고 싸우고, 서로를 파악한다.
관우는 조조의 위나라에 포로로 잡혀있는 신세이다. 백마성 공방전이 한창일 때 조조는 관우 앞에 나타나서 도와달라고 한다. 관우는 용맹하게 창을 휘둘러 원소의 대장군 안량(顏良)을 무찌른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이미 조조는 관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관우는 “몸은 지금은 여기 있지만 유비 형님의 소재를 알게 되면 곧바로 떠날 것이오.”라고 말한다. 조조에 의해 허수아비 신세인 한 헌제(漢獻帝)는 그에게 한수정후(漢壽亭侯)로 책봉한다. 그러나 조조의 설득과 부탁, 수작에도 굴하지 않고 형님 유비를 찾아 조조 곁을 떠난다. 소설 <삼국연의> 26~27장에 실린 ‘오관참육장’(過五關斬六將) 스토리가 펼쳐진다. 관우는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날리며 오관을 통과한다. 동령관의 공수, 낙양관의 한복과 맹탄, 기수관의 변희, 형양관의 왕식, 그리고 활주관의 진기를 차례로 무찌른다는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 전개라서 예로부터 꽤 인기를 끌었던 대목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오관참장의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삼국지 역사 이야기 = 三實七虛
우선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오관참육장’(^^ 過五關斬六將)이라는 군사적 돌파작전이 실제로 있었을까. 학자들은 이게 모두 허구라는데 뜻을 같이한다.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던 소설적 허구라는 것이다. 우선 지도를 갖다 놓고 5관을 찾아보아도 논리적이지 못하다. 나관중의 소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영화에서는 또 다른 ‘창작’을 더한다. 조조는 아쉽지만 관우를 유비에게 가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5관의 군사들이 죽자 사자 관우를 막아선다. 알고 보니 조조의 명이 아니라 황제의 명에 따라 그런 것이란다. 조조에게 찍소리 못하던 한 헌제가 반기를 들었다고? 영화는 지난 2천 년간 대중들이 갖고 있던 역사인식을 뒤바꾸어 놓는다. 한 헌제가 조조의 위세에 농락만 당한 바보등신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군사작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조조와 한 헌제의 관계를 기이하게 다룬다. 때로는 코믹하게 말이다. 관우는 황제와 조조가 나란히 벼농사를 짓는 모습에 놀란다. 조조는 “이 땅은 황무지였지만 내가 농사를 지었다. 이제 배고파 죽는 백성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한 헌제도 조조 때문에 쌀밥에 고기를 먹게 되었다고 진심으로 만족해하고 말이다. 실제 조조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둔전제(屯田制)의 성공적 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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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가 여자문제로 고민?
소소한 장면에서는 기존의 삼국지 스토리에서 많이 벗어난다. 분명 관우는 유비의 두 형수 -감부인, 미부인-를 데리고 길을 떠나는데 여기선 세 번째 부인(아직 정식결혼하지 않은)을 모시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이 세 번째 부인(기란)이 관우와 동향출신이고 관우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심히 짝사랑하던 여자였다는 설정이다. 조조는 간교하게도 그 점을 노려서 관우를 미인계로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우선 관우에게는 술을 먹이고, 기란에게는 미약을 먹여 한방에 넣는다. 그런데 유비 형님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관우는 기어이 유혹을 이겨내고 기란을 유비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조가 관우를 처음 잡았을 때 감부인과 미부인과 한방에 가두었다고 역사에 남아있다. 그런데 관우는 형수님을 깍듯이 모시고 밤새도록 문 앞에서 보초를 섰다는 것이다. 유비는 여자(아내)를 의복과 같이 여겨 함부로 대한 것 같은데 관우는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주군의 여인에까지 충성을 다한 것이다. 물론 삼국지를 보다보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관우가 여포의 부하 진의록(秦宜祿)의 전처(杜氏)에 반해 조조에게 넘겨달라고 하는데 조조가 일순 응했다가 직접 보고나니 워낙 미인이라서 자신이 차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관우의 반응은 ‘몹시 언짢아했다’(關羽心裡不舒服)고 역사에는 기록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웅호걸은 여색을 밝히는 모양이다. 적어도 삼국지에선 말이다 |
천하의 간웅 조조
아마, 조조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데 일조한 대목은 조조가 여백사의 일가를 다 죽이는 장면일 것이다. 조조가 동탁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여백사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조조는 여백사의 호의를 의심하여 몰살시킨다. 조조를 접대하기 위해 부엌에서 칼을 가는데 그 소리를 의심하여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여백사 관련 이야기는 여러 역사서에서 다양하게 설명되는데 <삼국연의>에서 결정적으로 조조를 간웅적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오해와 의심으로 무고한 일가를 몰살한 뒤 조조가 한다는 말인즉슨 “차라리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였다. 이 영화에서도 이 대사가 등장한다. 조조가 관우를 떠나게 놔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우가 계속 관문마다 생사를 건 싸움을 펼쳐야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조조가 화를 내니 그의 부하장수들이 서로 자신들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조조가 칼을 뽑아들고 순유(筍攸)를 죽이려하자, 다른 부하장수 하나가 나서서 “대인이 이전에 말하시기를 내가 천하의 사람을 배신하더라도, 천하의 사람이 나를 배신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다. (宁我负天下人 毋天下人负我) 이 대사는 삼국지의 명대사이자, <삼국지 명장 관우>의 명대사이다. 물론 관우가 한 말이 아니고 조조가 한말이지만 말이다. 삼국지 영화는 알고 보면 더 재밌다. 사실 <삼국지 명장 관우>는 좀 더 심플한 영화가 되었을 뻔했다. 관우가 유비를 도와 전쟁터에서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는데 집중했다면 말이다. 아마도 홍콩의 맥조휘, 장문강 감독은 당초 그런 영화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두 감독은 중국영화계의 거물이자, 역사물에 대해 남다른 탁견을 갖고 있는 강문(姜文,장원)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부탁한다. 강문은 기꺼이 그 작업에 참가했고, 생각도 못한 역사해석문제를 내놓았다. 조조에 대한 재해석은 아마도 강문의 재해석일 것이다. 당연히 천하의 간웅, 못된 조조라는 역사적 인식에서 탈피하여 깊은 역사적 안목과 인정을 지닌, 인간 조조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삼국지 마니아에겐 색다른 느낌이 드는 중국사극이 될 것이다. |
<삼국지 명장 관우>는 견자단의 액션영화를 보러가는 사람에게도 나름 만족할만한 액션물이다. 참, 견자단이 관우 같았냐고? 관우를 직접 본적이 없으니. 소설에 등장하는 관우는 거한이다. 키가 9척(207센티)에 수염이 두자요, 누에 눈썹에 봉황의 눈이고, 얼굴은 잘 익은 대추처럼 검붉고 목소리는 쇠북을 울리는 듯 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조조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이 없다. 위나라 중심의 역사서에도 좋은 묘사가 없는 것으로 봐선 못 생겼을 수도 있다. 게다가 조조의 키는 7척이란다. 161센티. 207센티의 관우와 161센티의 조조는 역사적으로 대면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런데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이렇게 쉽게 만나고 쉽게 말을 건다. |
영화에서는 관우의 후반부 인생은 몇 줄 글로 갈음된다. 관우는 손권에 의해 목이 잘린다. 손권은 관우의 혼령에 기겁하여 잘린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는 사마의의 진언에 따라 관우의 목에 향목으로 만든 몸통을 붙여 제후의 예에 대한 융숭한 장례식을 지낸다. 관우를 장례 지내고 묻은 곳이 바로 지금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있는 관림(關林)이다. 몸뚱이는 손권에 의해 당양에 묻혔다. 지금의 호북성 당양에 있는 관릉(關陵)이다. 그럼 관우의 덕을 가장 많이 봐야할 고향에는? 고향인 산서성 운성 해주에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이곳에는 머리도, 몸통도 아닌 그의 정신이 묻혀있다고 말한다. 물론, 관우를 모신 사당은 중국 수백 수천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 관우는 그만큼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단 말이다. (박재환, 201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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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진짜.. 낙양의 관림에 관우의 머리가 묻혀있을까?
낙양의 '관림'은 엄청 규모가 큰 사당이묘, 묘이다. 한참 안으로 들어가면 <한수정후묘>가 있다. 저 안에 분명.. 관이 있을 것이고, 그 관안에 나무몸통의 관우 머리가 안치되었다는 말일 것인데... |
그 묘의 규모는 거의 작은 동산 규모이다. 실제 1700년 이상 도굴꾼의 접근없이 파묻혀 있으리란 것은 희망사항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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