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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계실 ♬♡/정보마당

울지 마 톤즈 ㅡ 유감 있다

울지 마 톤즈 ㅡ 유감 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다.

 

  전화를 한 지인이  말한다.

‘톤즈 보셨수? 하두 사람들이 머라 머라 하니 보고 싶어서 말이우.’

‘나는 톤즈 보기 싫은데요,’

‘왜요?’

‘하두 사람들이 머라 머라 해서요,’

말은 그리했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 동네 북쪽 출판도시로 차를 몰았다.

참고로 파주 북시티 내에 있는 시너스 이채는 예술영화관이다.

잘 팔리지 않는 영화를 많이 걸어놓고 돌려가면서 상영하는데

광화문 시테큐브보다는 분위기가 쳐지지만 뭐, 영화를 분위기로 보는가?

버스타고 광화문 삼십여 분 걸려서 가는 것 보다 차 몰고 휙 가기가

심적으로 가볍기 이를 데 없다.

 

겨울은 밤과 정분이라도 난 듯 하다.

아니 밤이 겨울을 열애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밤은 해 저물기도 전 들이차고

눈이라도 내릴 양이면 겨울은 얼씨구나 팔 벌리고 밤을 얼싸 안는다.

사실 사랑에 빠진 것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렇게도 좋냐?

그렇다.

지나와버린 좋은 세월에 대한 연민이 발효돼선지 샐쭉한 억양에 빠지기 쉽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름이 흉내 낼 수도 없는 사람임에랴,

그래도 내가 누군가? 평등이라는 위대한 모순을 거대 담론으로 삼고 살아가는

구조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우리 성생님의 말씀에

위로받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 아닌가?

그러니 화장지를 준비하면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울지 마, 톤즈를 보면서 울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고였다.

온 몸에 퍼진 암에 대한 결과를 듣고 난 후,

아프리카 수단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석해서

기타를 치며 경쾌하면서도 왠지 슬픈 빛을 내쏘는 노래,

이신부가 땅거미~~~~를 부를 때,

겉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속에 들이찬 슬픔을 꾹꾹 누르면서 노래할 때,

마치 숨겨놓은 슬픔이 풍선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의 탈을 자꾸만 삐져나올 때,

그러니까, 지금 나보다 더 젊은 남자가 사형선고를 받고,

자신보다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즈음 그곳 그 대목에서

인생의 적막함을 생각했고

고적한 삶을 응시하자 눈물이 고였다.

그 가변적인, 도대체 예측 불가능한, 불공평하기 그지없는,

그러면서도 해일처럼 거침없이 다가오는 삶,

그 쓰라린 상처투성이의 물질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분의 삶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슈바이처 이상이었다.

전공도 아닌 음악을 즐기는 모습과 악보까지 만들어가며

브라스밴드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문을 두드리면 뛰쳐나오는 의사신부님

한센병을 가진 이들과 정말 예수님처럼 함께 하는 모습,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지만

(정말 그런 분의 그을림은 얼마나 우아하고 깊으며 아름다운가?)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과 함께 해서 도무지 외롭지 않다고 대답하는 그는 참 성직자였다.

이곳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왜 그 먼 아프리카까지....

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어머니의 사랑처럼’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고 자신의 책에 적었다.

 사실 인생은 모르는 일 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참으로 유감이다.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삶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는 미덕 외에는

‘울지마 톤즈’는 조악한 다큐멘터리였다.

 

이해는 한다.

속전속결의 티비 감독이

(원래 울지마 톤즈는 텔레비젼 다큐로 제작되었다)

숙성과 발효를 담기에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을 담기에는 그들의 시간이 너무도 없다는 것을,

니체가 증오했던 대중은 그들보다 더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것을,

 

타고난 후각으로 ‘물건’이 될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의사, 안정된 삶을 버리고 택한 사제의 삶, 아프리카에서의 시간,

그리고 갑자기 다가선 죽음의 그림자,

어느 드라마가 이토록 다양한 소재를 구비하고 있으랴,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분에 대한 기록을 해가면서 평이한 우리들과는 분명히 다른

고상함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분에 대한  예의로라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정성을 다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분이 지닌 아프리카에 대한 사랑과 정성을,

진지한 삶에 대한 성찰을,

살아 생전 직접 그분을 인터뷰 하지 못했다면

그분의 글속에서라도 더 깊이 찾아냈어야 옳다.

수녀와 신부의 길을 같이 걷는 그들 형제는 어떤가?

(아, 혹시 그들이 고사했을까?)

깊고 순결한 인생을 담으려면

적어도

그를 담는 카메라도 깊고 순결한 흉내는 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프로그램이

반짝이는 폭죽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순간에 사라지는 폭죽만 바라보고 살것인가?

오히려

은근한 촛불이 우리의 식탁을 깊은  어둠을 밝하는것 아닌가 말이다.

 

'울지마 톤즈'의 감독은

어쩌면 긴세월을 헐벗은 이들과 함께 한 이신부의 삶,

깊고 은근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주위를 밝히는 촛불처럼 타오르는 삶을

폭죽처럼 그려냈다. 

 

괜히 만만한 어질고 순박한 눈빛의 아이들에게 신부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는 그 아이들을 찍으면서 보는 우리들에게 눈물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에 대해서 물어보라,

엄마 좋아요? 싫어요?

아마 조금 전에 쵸코렛 사달라는 것 안 사 준 후라면

아이는 외칠 것이다. 엄마. 미워요!!!!

 

적어도 영화로 재개봉하기 전이라도

다큐멘터리의 미덕인 뒤에서 따라가기를 심도 있게 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태석 신부가 키큰 딩카족들에게 가르쳐준 ‘사랑해’

불분명한 발음의 서투른 합창이 주는 감동은 눈물겨웠다.

웬만한 드라마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아무리 드라마틱한 드라마라 할지라도 흥!바라보는 데에 너무 익숙해진

둔감한 나에게도 그랬다.

 

(사족이긴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난 후

선명한 생각하나,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같이 펑펑울지 못하고 끄적이는 너도 참 유감이구나! ^^* 싶다.

글도 사실 매우 냉정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