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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영도다리는 다시 들것인가?


7천t급 관부연락선 '곤고마루'(金剛丸)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렸다.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지 불과 7시간 만이었다. 간혹 조선 사람들도 보였지만 기모노 차림에

양산까지 들고.... 한껏 멋을 부린 일본 여성을 비롯해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중략)

 부산부청 옆에는 상판을 들었다 내리는 영도다리가 있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80도 정도까지 상판을 들어올렸다. 때마침 범선이 예인선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다리를 드는 15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배를 통과시키기 위한 방편이라 했다.

< K씨의 1939년 기행기 중에서.>

영도대교는 지난 1934년 11월에 개통한 한국 최초의 '일엽식 도개교'(한쪽만 들리는 다리). 총 길이 214.63m

중 내륙 쪽 다리 31.30m를 하루 7차례씩 들어올렸단다.

 다리가 세워지게 된 것은 일본이 영도를 식민도시 부산의 배후지로 조성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는데...

1916년 일본은 영도에 어항을 건설할 목적으로 영도 앞바다인 대풍포를 매립했다. "1910년대 영도 인구 2천

465명 중 3분의1인 862명이 일본인이었다네.

 말로는 영도섬의 빈민구제사업으로 다리를 짓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영도를 공업·군사기지로 활용하기 위

해 물류 수송로가 필요했던 거란다. 원래 8개의 고정교각으로 된 다리로 만들려고 했지만 선주와 어민들의 반

대로 다리 한쪽을 도개교로 설계변경했다.



그 당시에는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다는데....

그때 돈으로 총 공사비 360만원이 들어간 영도대교 준공식에는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 다리를 들어올리는

장면을 구경했고, 다리 개통 이후 영도는 번성기를 맞았단다. 부동산가격이 2~3배 뛰어 '도개교가 올라갈 때

마다 일본인 땅장수 하사마의 땅값이 따라 올라간다' 고 주민들이 비아냥거릴 정도였단다...



한국전쟁중에도 수많은 피란민들이 영도로 몰려 들어 정착했다.

생계를 이을 일거리가 많은 국제시장과 자갈치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

 영도다리는 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단골 약속장소이기도 했다.

만날 곳이 마땅찮았던 당시로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인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부모, 형제가 혹시

오늘은 나올까 하며 다리위를 서성대곤 했다는데, 실제로 극적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해 만남의 장소로 입소문

을 탔고...그 덕에 영도다리 인근에는 당대 유명한 명인들의 점집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애환도 동시에 얽혀 있다.

일제시대에는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바다로 뛰어내렸고... 전쟁 이후에는 생활고와  외로움에 지친 실

향민들이 영도다리에서 인생을 마감하기도 했단다.



부산 영도구(섬)와 중구(육지)를 연결하는 영도다리는 1934년 11월 준공됐으나 1966년 영도대교는 다리 들

어 올리기를 멈췄고 이후 부산대교가 건립되며 차츰 그 명성은 퇴색해 갔다.

 그후...노후화로 안전에 문제가 생긴 데다, 부산롯데월드 건축 과정 중 교통영향평가에서 부적합하다는 판정

을 받아 2013년 완공 목표로 2007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2011년 2월.현재..부산시와 영도대교 문화재자문위원회는 영도대교 해체 구조물이 전시관으로 옮기기 전에

마지막 해체공사 현장을 시민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공개는 오는 26일부터 3월 13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란다.

이 기간에 시민들은  다리를 들어 올려 배를 지나가게 했던, 국내 유일의 도개교인 영도다리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개교를 작동하는 기계실 내부 모습도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다리는 소통을 위해 존재합니다. 아픈 역사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쓸 수 있잖아요. 영도대교를 문화

   와 예술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추억의 다리가 희망의 다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영도다리는 앞으로 도개 기능뿐만 아니라 만남의 기능으로까지 살아날 전망이다. 영도구청 관계자는 "장기적

으로 만남의 광장을 조성해 시민들이 수시로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영도다리는 생생한 근대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34년 11월 23일 오전 11시. 최초의 연륙교 영도다리

개통식에는 6만여명이 몰려들었는데,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여명이었단다. 영도다리 상판의 한 부분이 올라

가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탄성이 쏟아졌었고....

하지만 1966년 이후 상판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교통량이 늘면서 도개 기능을 없앴기 때문이다. 이후

철거 위기까지 몰렸던 영도다리.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2012년께 도개 기능을 살려 복원될 전망이다.
moo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