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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초경 발원 1000년, 대장경이 어떻게․왜 가야산에 있을까?

팔만대장경 초경 발원 1000년, 대장경이 어떻게․왜 가야산에 있을까?

팔만대장경의 초경을 발원한 지 올해로 꼭 1000년이 됐다. 팔만대장경은 1011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최초의 목판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발원한 이래 1251년 완성됐다
.이규보(1168~1241년)의 ‘대장각판군신기도문(大藏刻板君臣祈禱文)’에 판각 동기가 나와 있다.
현종 2년(1011년)에 거란이 침입하여 현종이 난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했으나 물러가지 아니하여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경판을 새기기를 서원한 후에 비로소
 거란병이 물러갔나이다.(후략)’



팔만대장경 초경 발원한 지 올해로 꼭 1000년이 된다. 가야산 해인사 일원과 합천군에서는 올해 성대한 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사진은 세계 최대의 목판본이자
국보 32호,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 전경. 당시 고려는 초조대장경의 판각을 통해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려 했다. 이것이 고려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으로 송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판각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실됐다. 그리고 다시 대장경 판각을
완성(1251년)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세계 최대의 목판본으로 국보 제 32호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 52호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3번의 큰 수난을 겪었다. 

그 첫 위기가 임진왜란이다. 당시까지 가야산은 십승지지의 오지로 전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인사가 너무 깊은 오지라 왜군이 들어오지 못한 덕분에 다행히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리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양이 너무 많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규모는 가로로 쌓으면 경판수가 8만1350장으로 백두산 높이가 되며, 4톤 트럭 70여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꼬박 읽어야 전부 읽을 수 있고, 5200만자의 글자도 마치 한 사람이 쓴 듯한 똑같은 필체를 자랑한다.

마지막으로 6.25전쟁 때에도 해인사가 폭격당해 사라질 뻔했다. 지리산의 북쪽 끝 지점과 연결되는 가야산은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연합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김영환 대령이 폭격하지 않고 직접 소탕에 나서 보호했다고 한다. 김영환 대령의 공적비는 비석거리에
 있으며, 해인사에서 매년 봄 추모제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국보 52호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팔만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으로 피신해 있던 강화도 선원사에서 제작됐다. 그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을까?
 일제도 그 방대한 양 때문에 가져갈 엄두를 못 냈던 대장경인데…. 한마디로 경이롭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략 두 가지로 유추하고 있다. 강화에서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타고 상류로 올랐다는 설과 한강․한양․여주․충주의 남한강을 거친 다음 육로로 괴산․상주의 산악을 타고 넘어 다시 낙동강 수운을 통해 개경포에
이르렀다는 설이다. 개경(開經)포는 ‘나루터에서 대장경을 풀었다’는 의미다. 대장경에도 개경포라고 나온다. 해인사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
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대하게 이운(移運)식을 거행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