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도시의 거리에서 만난 낯모르는 이성과 혹은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이름도 모르는 이성과 혹은
여행 중에 만난 전혀 낯선 이성과 혹은
도시의 골목길 모퉁이에서 만난 이성과 혹은
집 보러 갔다가 만난 전혀 낯선 이성과
예기치 않은 강렬한 섹스를 해 본 비밀스런 경험이 있나요?
그 때 사람들은 아마도
서로의 이름이나 나이, 직장, 고향 등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몸을 섞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섹스는 의외로 아주 격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곤 낯모르는 이와의 그 거치른 섹스가 끝난 후에 사람들은
여전히 이름도 묻지 않은 채 총총히 헤어져 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낯모르는 이를 만나 예기치 않게 격렬한 섹스를 나누는 영화가 있는데
그것을 아주 우연히 감상하게 되었다.
바로 그 유명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오늘 소개함은 그것의 '야한'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럼 뭐냐구?
.
.
<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가 올해 얼마전 5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그 망자'亡者'를 애도케 한다.
'망자'의 청춘과 美와 일과 삶을...
그리고 또 하나,
1970년대에 너무 외설적이라고 소문나서 한국에서는 상영도 되지 못했던
이 영화는 25년여 지나서 허용되었는 오늘에사 보니
내용상 뜻밖에도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주제가 있는' 유럽의 프랑스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제가 있는 영화'는 헐리우드가 자주 망각하는 면이라 반갑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영화!
그것을 만나는 일은 괜찮은 작은 사건이었다
73년 개봉 당시 정면 누드, 육두문자, 자위 행위 등으로 외설논쟁을 불러일으켰었다.
근데 지금 보면 꼭 그렇게 '대단히' 외설스럽지도 않다...
주요 야한 장면은 부옇게 처리되었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도 X등급 판정을 받아 논란이 되었다는데 이 영화는 25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원초성을 대표하는 요소들 중 하나인 성행위는 종종 사회구조적 억압과 소외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해석된다.
이런 도발적 성행위를 다루는 영화의 마지막은 대체로 쓸쓸한 이별 내지는
죽음이 기다리곤 한다. 탈출구가 없기 때문에 원점으로 귀결 되는 것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이외에도 보는 각도와 관심에 따라 다양한 논의가 가능한 영화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충동적인 성행위에 몰두하는 남녀 두주인공은
소외되고 외로운 현대인의 섹스 자화상은 아닐까...
영화 <마지막 황제>를 감독한,
1972년 작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이 영화에서 68세대로서의 자신의
사회주의적 이념과 그 망가진 혁명에 대한 허무한 감정을
은유와 비유로 암시한다.
감독의 혁명에 대한 허무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회주의 혁명에도 참여했던 주인공 미국인 폴은 파리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아내와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자살한다. 아내의 이름은 로자인데 이는 독일의
여성 공산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일치시키고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음악, http://www.youtube.com/watch?v=Z3uI08WUbH0&feature=related
한 때 사회주의자였던
폴은 현실을 개혁할 힘도 의욕도 없다. 단지 어린 잔과의 변태적인 섹스에만 열중하는데... 잔의 엉덩이에 버터를 바르고 섹스하거나, 잔으로 하여금 손가락을 항문에 넣게 하거나.., 이런 변태들에서 주인공이 보편과 격식을 혐오하는 무정부주의자임을 드러낸다.
섹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빈집으로 설정된 것은
주인공 남자의 정처 없는 정신의 공허함을 대변한다.
여주인공의 음모 노출에 그치는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섹스 장면은
인터넷 포르노가 판치는 이즈음에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노출과 섹스 장면이었다고 한다.
기존의 모든 가치에 반기를 드는 폴은 변태적인 취향의 섹스를 즐기는 것은 물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탱고 무도회장에서조차 술에 만취된 채 엉망으로 춤을 춘다. 따지고 보면 프랑스가 배경이지만 미국인이 주인공이고 대사도 프랑스어와 영어가 혼재되며 감독은 이탈리아인 것까지 감안하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무국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은 예정된 것인데. 변태적 섹스에 탐닉하다
총살당하는 남자 주인공은 사회주의의 허무한 패배를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중년인 미국인 남자 폴과 어린 파리 여성 잔느가 파시 街의 빈 아파트를 둘러보다 마주친다. 그 아파트에서 중년의 아내를 잃은 남자와 20살의 여자와의 첫 만남이 있고 곧바로 격렬한 정사로 이어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름도 신분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사람은 으르렁거리며 짐승처럼 관계를 나눈다.
여자가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싶어할 때마다 남자는 여자를 협박하고 난폭하게
새도마조히즘적인 성교를 맺는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성행위를 하고는 둘은 인사도 없이 거리를 나선다. 곧바로 헤어져 각자 자신들의 목적지로 향한다. 여자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약혼자 톰에게 안기고 폴은 아내가 자살한 여관방으로 간다.
남자는 여관에서 장모와 이야기를 나눈다. 장모는 남자에게 딸의
자살 이유를 묻는데 그는 자신도 알 수 없어 화를 낸다. 아내는 여관 손님과 성관계를 갖고 주인공(한 남자)의 잠옷과 같은 잠옷을 성 관계를 가진 손님에게도 입혔다. 이것만으로는 남자는 아내의 자살이유를 알 수 없다.
주인공 여자 잔느는 약혼자의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그 폴의 색다른 매력에 이끌려 아파트를 찾는다. 남자가 없는 빈방에서 여자는 흐느껴 운다. 그녀가 센 강변에서 그들은 다시 만난다. 그녀가 그를 따라간 탱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나 여자는 대화보다 정사를 나눌 수 있는 호텔을 원한다. 그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ek. 그의 파행적 행동에서 도망치려 한다. 그는 여자의 뒤를 쫓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녀를 붙잡는다. 그녀는 그를 뿌리치고 아파트에 들어가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꺼내든다. 여자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그녀는 미친 듯이 중얼거린다.
"난 저 사람을 몰라. 저 사람이 날 쫓아왔어. 날 겁탈하려고 했어. 난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누군지 몰라…"
베르톨루치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제의 키워드는 아마도
'모른다'일 것이다.
주인공들은 상대방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성행위를 시작하고
끝낸다. 남자는
아내가 왜 자살했는지 '모르고'
여자의 애인은 여자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여자는 자신과 격렬한 섹스를 나누는 그 남자를, 그리고 마침내는
나중에 남자를 총살하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소리친다.
'모른다'는 단어와 의미는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며 해답이 아닐까...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삭막한 관계를 표상하는
낱말은 아닐까.
이 '모른다'는 '화두'는 오늘의 신종 '사이버 관계'에서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는 단어는 아닐까....
여러분들은 사이버 '친구'(!)들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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